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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실(精明室)

밀양박씨 경헌고택(密陽朴氏 敬軒古宅)

48.2x107.0x2.2 / 초서(草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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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정명실(精明室)
  • 글자체 초서(草書)
  • 크기 48.2x107.0x2.2
  • 건물명 정명실(精明室)
  • 공간명 밀양박씨 경헌고택(密陽朴氏 敬軒古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울산 북구 송정동 735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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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실(精明室)

정명실(精明室)


정명실(精明室)은 양정재(養正齋) 박시준(朴時駿, 1874~1942)이 선친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울산광역시 북구 가대리 오정동에 건립한 우경재(寓敬齋) 안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정명’은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외적인 행동을 조심하고 내적인 마음을 극도로 맑고 깨끗하게 해서 고인을 추모하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기』, 「제통祭統」에 “군자가 재계하는 것은 오로지 맑고 깨끗한 덕을 극진히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7일 동안 산재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3일 동안 치재하여 마음을 가지런하게 한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재계’라고 하는데, 재계는 맑고 깨끗함의 극치이다. 그런 뒤에야 신명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君子之齊也 專致其精明之德也 故散齊七日以定之 致齊三日以齊之 定之之謂齊 齊者 精明之至也 然後可以交於神明也]”라고 한 데에서 인용하였다.

응축된 필치에 강한 에너지를 품었다. 굳세고 활달한 필획이 좁은 공간에서도 넉넉하게 달린다. 필획이 빽빽하게 모여 긴밀할 때(密)는 바람도 통하지 못하게 하며, 드문드문 성글어 비워둘 때(疎)는 말이 달릴 수 있듯이 넓게 한다. 고인이 말한 疎(소)와 密(밀)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깊이 들어간 붓은 제자리에서 쉬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획은 형태를 갖춘다. 붓끝은 제자리에 두고 오직 허리의 움직임만으로 필획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密(밀)이 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밀(密)이 있기 때문에 이제 붓을 살짝만 이동을 해도 공간이 생기고 그곳이 疎(소)가 된다. 소밀 관계만 잘 알아도 좋은 화면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익숙한 필치로 소밀의 화면구성을 능숙하게 하였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밀양박씨 경헌고택(密陽朴氏 敬軒古宅) 소개


경헌(敬軒)고택은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일대에 세거한 밀양박씨(密陽朴氏) 송정문중의 일원이다. 밀양박씨의 시조는 박혁거세이며,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寢)은 밀양박씨의 관향조로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8왕자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밀성대군에 봉해졌다. ‘밀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의 옛 지명이다. 밀양박씨가 울산으로 이거해 온 것은 1664년(현종 5)에 괴천(槐泉) 박창우(朴昌宇, 1636~1702)가 이휴정의 초청으로 울산의 예문을 가르치는 예사로 초빙되어 왔다가 머물러 살면서 밀양박씨 울산 입향조가 되었다. 박창우는 죽재(竹齋) 박사신(朴士愼)의 손자이고 박현(朴晛)의 아들로 영천 괴하리에서 출생하였다. 1666년(현종 7)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생원으로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주역』을 깊이 연구한 그는 여말에 역동(易東)으로 불린 우탁(禹倬)에 견주어 역남선생(易南先生)이란 칭송을 받았다. 이후 밀양박씨 송정동 가계는 하계(何溪) 박세도(朴世衜) → 박천보(朴天普) → 박이충(朴履忠) → 박성창(朴性昌) → 박사유(朴思裕)로 이어진다. 박사유의 아들 박정복(朴定復, 1842~1923)이 바로 밀양박씨 경헌고택의 주인이다. 박정복의 가계는 양정재 박시준, 박용진(朴墉鎭)으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김주부, 「밀양박씨 경헌고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27, 한국국학진흥원, 2015.